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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 정치 사건

[부마민주항쟁(1)]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지금의 창원시 서부)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 박정희 정권의 한계

197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 인권 탄압 논란이 불거졌고, 당시 미국은 독재자 킬러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라 독재정권의 인권 문제를 압박해왔기 때문에 한미관계도 역대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또한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행해오던 개발 정책 또한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증세와 물가 폭등, 그리고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임금 상승으로 인해 대중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대중들의 박정희 체제에 대한 불신도 점차 커지고 있었던 것. 


이런 상황 속에서 제2차 석유 파동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부가 한창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또한 휘청거렸다.


박정희 경제


그리고 중화학 공업 육성이 정부의 조정 실패로 중복, 과잉 투자되면서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상황 속에서,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 지역의 많은 중소업체들은 대출이 급속히 줄어들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듯 당시의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 등의 여파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요인은 이후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 김영삼을 국회의원직 강제 제명 날치기 통과

결과적으로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을 포함한 야권 세력은 여당을 득표율에서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불안감은 커져만갔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79년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강경 대여노선을 취하며 과감하게 민주주의에 관한 사항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 "유신대학교" 부산대학의 시위 

이때 신민당 당사에서 YH 사건이 일어나 이를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야당 당사에 직접 경찰이 들어갔다)에서 벌어진 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을 강한 논조로 비난했고, 이에 국회에서는 국가 체제에 대한 모독을 이유로 10월 4일 날치기로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강제 제명한다.


김영삼 박정희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 이진걸은 민주선언문을 인쇄,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그 날 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가 경찰에게 쫓기자 이번에는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배포했다. 그래서 10월 15일 도서관 앞에 사람들이 모였지만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 날 시위는 무산되었다. 


사람들이 무력감에 좌절하는 상황에서도 법정대 그룹, 언더 써클 그룹, 아카데미를 비롯한 민주 동아리 계열, 상대 경제사학회 등에서 다시금 시위 준비를 했고, 그 결과 10월 16일 오전 도서관에서 드디어 시위가 벌이지기 시작했다.


평소 데모 안하기로 유명해 유신대학교(...)라는 오명이 붙어있던 부산대학교 도서관에서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시위 인원이 늘어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일제히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과 부산시청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 와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


늦은 오후부터는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를 무대로 게릴라식 전개되었다. 


박정희 경제

  • 단순한 학생 시위를 넘어 민중항쟁으로 전개

여타 시위와 달리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로 단순한 학생 시위를 넘어 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이나 김밥, 청량음료, 캔맥주 같은 먹을거리와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도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을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범 시민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문에 민중이 일어난 것이라 하여 민중항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밤이 되어 시민들이 더욱 합세하자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어갔다. 파출소, 어용 신문사와 방송사, 경찰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되었다. 


10월 17일부로 부산대는 긴급 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계속 전개되었다. 중구, 서구, 동구 지역의 거의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 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KBS, MBC, 부산일보사, 경남도청, 그리고 TBC-TV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당시 부산시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도합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에서의 시위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 계엄령

  •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 선포

부산에 육군 특전사의 2000여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 마산으로까지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 진해, 함안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가 불타는 등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시위 강도는 한츰 격해지고 있었다. 


부마항쟁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육군과 경찰 뿐 아니라, 대한민국 해군의 주요 기지와 부대들이 위치한 진해 지역에선 해군 육상 지원부대 근무자들까지 유사시를 대비해 시위진압 등의 훈련을 급히 하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예비역 수병은 전역이 코앞이던 와중에 난데없이 샘브레이와 당가리 대신 잔뜩 실어와 던져준 민무늬 작업복 입고 빡센 시위진압훈련을 며칠 하느라 날벼락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부마항쟁 계엄령

부마항쟁 계엄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