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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 정치 사건

라스푸틴은 누구인가? 최순실과 비교되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Распу́тин / Grigori Yefimovich Rasputin


서구권에서 '간신'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 


러시아 제국 시대 인물로, 본래 떠돌이 수도자였으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의 병을 호전시킨 일로 황제의 신임을 얻으면서부터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러시아 제국의 몰락에 일조한 인물이다. 


다만 러시아 제국은 유럽 주요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전제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고 붕괴한 근본적인 원인은 개혁을 외면하고 백성을 억압한 차르 체제의 자업자득이기에 라스푸틴 때문이라고만 잘라서 말할 수는 없다. 라스푸틴의 전횡이 제정 러시아의 멸망을 앞당기긴 했어도, 라스푸틴이 없었더라도 제정 러시아는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행적을 보면 정말 이름값을 제대로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행적이 행적이다보니 라스푸틴을 칭하는 수식어 역시 별로 좋지 못한데, 영어권에서는 대놓고 "미친 수도자 라스푸틴 (Mad Monk Rasputin)"이라고 불리며, 한국에서는 "요승 라스푸틴" 등으로 지칭한다.


요승의 등장

1869년 시베리아 튜멘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노비흐'였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는 다녔지만, 학업에는 불량해서 문맹이었다. 


많은 여자들과 사귀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자 사람들이 '방탕한 놈'이라는 뜻으로 '라스푸틴'이라고 부르고, 이게 성으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사는 동안 알려지지 않은 계기로 인해 돌연 출가, 15년 동안 수도승을 자처하며 러시아 전역을 떠돌았다. 출가한 이후 잠시 결혼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방랑병이 도져 떠돌아다닌다. 그리스의 아토스 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터키의 카파도키아 등을 돌아다녔다. 아토스 산이나 예루살렘, 카파도키아는 모두 그리스도교, 특히 정교회에서는 성지 혹은 유서 깊은 장소로 존중받는다. 라스푸틴은 일부러 그런 곳을 골라 다녔을 것이다. 다만 정식으로 신학을 배운 적이 있는지는 불분명.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03년부터였다. 


라스푸틴그리고리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Распу́тин Grigori Yefimovich Rasputin


당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4녀 1남 중 막내인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가 혈우병을 달고 태어나 황제 부부와 온 황실의 근심거리였다. 황태자의 혈우병은 황후의 외할머니인 영국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것이었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정도로 많은 후손을 두었고, 딸들과 손녀들이 유럽 여러 나라로 시집가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 외에도 여러 나라의 여러 후손들이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받아 고생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당시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 혈우병으로 사경에 있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황태자의 상태를 호전시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사용한 치료요법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물리적인 치료보다는 태자에게 마음의 안정을 취하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애초에 병든 어린아이에게는 사무적인 태도의 의사들보다 자상하고 인자한 아저씨가 건네는 말이 더 편안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혈우병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서 의사들도 손 쓸 방도가 없었고, 환자를 안정시켜서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것이 적어도 그 당시에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교와 외교, 심지어는 내정 까지도 간섭하였다. 사실 니콜라이 2세는 정치가 적성에 맞지 않은 인물이라, 26살에 제정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했을 당시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 나라를 다스려주겠다는 라스푸틴이 나타나니, 얼씨구나 하고 라스푸틴에게 맡기고 손을 놔버린 것이었다. 


라스푸틴그리고리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Распу́тин Grigori Yefimovich Rasputin


이런 니콜라이 2세를 등에 업고, 라스푸틴은 방탕하고 음란한 생활을 즐기며 세력을 점점 불려나갔다. 심지어 공주들의 가정교사를 강간한 일도 있었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이 하는 일은 모두 성스러운 것"이라며 오히려 그를 고발한 가정교사를 해고했다. 당연히 라스푸틴은 황족들과 귀족들의 공분을 사게 되었다. 


특히 일개 수도승이 정치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이유로 니콜라이 2세의 장녀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는 라스푸틴을 싫어하여 그녀와 견원지간이 되었다. 올가 공주는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쫓아내 달라"고 요구했으나, 라스푸틴을 맹신했던 황후는 오히려 올가 공주를 심하게 꾸짖었다. 이 때문에 모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황후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라고 충고했지만, 황후는 언니의 말도 듣지 않았고, 자매 사이도 나빠졌다.


라스푸틴이 지나치게 정치에 간섭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만이라도 좋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미움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군은 초장부터 독일군에 연전연패해서 수세에 몰려 있었고, 니콜라이 2세는 전선을 수습하겠다면서 본인이 직접 전선에 나가 총사령관을 맡았는데, 라스푸틴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를 통해 차르에게 "남부 전선에서 공세를 펼치면 승리할 것이라고 하느님이 계시를 내려주셨습니다."라고 상신했고,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주위의 장군들과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스푸틴의 "계시"를 정말 따랐다. 


그 결과 러시아군의 전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었고, 러시아는 서부 공업지대와 곡창인 우크라이나까지 독일군에게 빼앗겼으며 막대한 전비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나게 되어 전 국가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다. 황제야 또 속냐!!


이런 니콜라이 2세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에, 2월 혁명 후 그를 보호하려던 러시아 임시 정부의 수장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결과적으로 케렌스키는 10월 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만다. 


라스푸틴그리고리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Распу́тин Grigori Yefimovich Rasputin


볼셰비키는 케렌스키의 우를 범하지 않고,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모조리 총살하게 되니, 라스푸틴은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 물론 제위를 잃고 처형당한 건 그런 요승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니콜라이 2세의 자업자득이긴 하다. 


또한 라스푸틴은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귀족 여성들, 심지어 공주들과의 성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 공주들은 대부분 라스푸틴을 싫어해서 오히려 황제와 황후에게 그를 멀리하라고 간언했다고 전해질 정도니, 라스푸틴과 사적으로 만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괴상한 소문이 퍼졌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신체적 특징 탓이 아니었을지. 또한 황후 역시 라스푸틴과 성관계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반대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난교를 즐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리 라스푸틴 당시의 러시아 제국에는 펠릭스 유수포프(Феликс Юсупов) 공작이라는 귀족이 있었다. 유수포프 가문은 흑해-카스피해 스텝에 있었던 노가이 칸국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이반 4세 때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펠릭스는 차남으로 태어났고, 딸을 기대했던 부모에 의해 어렸을 때는 여장을 하고 자랐다. 그러나 펠릭스의 형은 젊었을 때 결투 중에 죽었고, 펠릭스가 유수포프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펠릭스의 아내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는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제니아(1875-1960)의 딸이므로, 펠릭스는 니콜라이 2세의 조카사위가 된다. 펠릭스의 장인 알렉산드로 미하일로비치(애칭 산드로, 1866-1933)는 니콜라이 1세의 막내 아들 미하일의 4남으로, 펠릭스의 장모 이리나와는 5촌이다.


1916년 12월 20일, 펠릭스 유수포프를 중심으로 반 라스푸틴 황족·귀족들이 라스푸틴 몰래 그에 대한 궐석재판을 실시하고, 일방적인 재판 진행 끝에 사형을 선고한다. 


황족들 중에서도 라스푸틴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이들은 많았으나, 하필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이 앞장서 라스푸틴 암살에 나선 이유에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라스푸틴이 공작의 얼굴을 보고는 "당신은 게이 아닌가. 나는 게이가 싫다!"고 말해 그 때부터 원한을 품었다는 설. 유수포프 공작은 여장남자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여장을 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아마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다른 하나는 유수포프 공작의 아내 이리나 공주의 미모에 흑심을 품은 라스푸틴이 찝적대자 이에 공작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그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설이다. 하긴 평민 출신이, 그것도 정상인이 아닌 사이비 종교인이 일반 귀족도 아닌 황녀에게 그랬으니.


널리 알려진 살해 과정

그렇게 라스푸틴은 1916년 12월 30일 유수포프 공작을 비롯한 반대파 황족들의 계략에 속아 잔치에 초대되어, 치사량의 청산가리가 든 케이크와 술을 먹게 된다. 그런데 즉사해야 할 인간이 2시간이 지나도 죽기는커녕, 노래를 부르고 파티를 즐겼다. 암살자들은 속으로 공포에 떨었지만, 너무 늦으면 시체를 몰래 처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결국 계획의 핵심인물인 유수포프가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을 쏘았다.


그 직후 유수포프를 비롯한 황족들은 즉시 자리를 빠져나갔다가, 외투를 두고 온 유수포프가 황급히 다시 돌아왔는데 라스푸틴은 여전히 죽지 않고, 오히려 유수포프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이후 다시 다른 황족들에 의해 총에 피격당하지만 라스푸틴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파티장 밖으로 도주하던 도중 곤봉과 쇠사슬 따위로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다음 네바 강 부근으로 말에 묶인 채 질질 끌려갔지만 그때까지도 멀쩡히 살아 있었고, 끝내는 꽁꽁 얼어붙은 네바 강 아래로 던져졌다.


그리고 며칠 뒤 라스푸틴의 시체를 건져내 조사해 보니, 치명상은 총상이었으나 그의 사인은 익사였다. 


라스푸틴은 암살 위협에 따른 위산 과다로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는 설이 있으며, 당시의 부검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의 위 속에는 독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들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사인 역시 폐에 들어간 물의 양으로 볼 때 익사했는지 사망한 후 폐에 물이 들어갔는지 밝혀낼 수 없다고 한다. 총탄을 맞고 심하게 구타당한 것은 사실인데, 총알의 구경이나 박힌 총알의 수는 자료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한다.


살해 실패 이유에 대해서는,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없었던 공작 일당이 필요한 독의 양을 잘못 산정했다는 설 및 사격 솜씨가 너무 형편없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나중에 경찰이 네바 강의 얼음 밑을 조사해 보니, 라스푸틴의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라스푸틴의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사망 과정은 정황상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유수포프 일당이 자기들 딴에는 치밀하게 준비했지만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었든지, 운이 나빴든지, 아니면 정말 라스푸틴이 불가사의한 생명력의 소유자였든지 말이다.


라스푸틴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아예 돌팔이는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 편지를 남긴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오기 전까지 살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러시아 제국의 국민들과 러시아의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내 형제와도 같은 러시아 국민들의 손에 죽게 된다면, 러시아 황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왕조는 앞으로도 수백 년을 더 지속할 것이니까. 그러나 내가 만일 특권층, 귀족들의 손에 죽어 그들이 나의 피를 솟구치게 만든다면, 그들의 손은 앞으로 25년간 피에 젖은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를 떠날 것이며, 25년간 형제들은 형제들을 서로 죽이고 미워하게 될 것이고, 끝내 러시아에 귀족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황제여, 만일 당신이 나 그리고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된다면 당신은 다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의 일족 중 누구라도 내 죽음에 연루된다면, 2년 내에 당신의 일족, 가족과 자식들까지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 민중들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는 가지만, 나는 내가 사라진 이후 황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할 책무를 느낀다. 반성하고 신중히 행동하라. 당신의 안전을 생각하고, 당신의 일족들에게 내 피의 앙갚음이 있을 것임을 알려라. 


나는 죽을 것이며, 더 이상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 기도하고 기도하며 마음을 굳게 가지며 당신의 가족을 생각하라. 

- 그리고리 씀.


과연 그가 죽은 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모든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을 계승한 소련은 적백내전과 공산당의 분열, 대숙청 등 내부 분열에 시달렸으며 정확히 25년 뒤에는 독소전쟁이 발발한다.


다만, 정작 암살 주범인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과 아내인 이리나는 목숨을 건져 각각 1967년, 1970년까지 제 명을 누리다 죽었고, 공범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니콜라이 2세의 사촌)도 1942년까지 살다 죽었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의 아버지와 이복동생은 이후 공산 혁명으로 살해당했지만, 본인은 라스푸틴을 죽인 덕분에(?) 살아남았다. 


라스푸틴 살해에 격노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가담자들을 처벌하려 했지만 다른 황족들의 탄원으로 인해 잠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가 페르시아(이란) 국경으로 보내버렸기 때문. 오히려 쫓겨나서 목숨을 건졌다 물론 혁명으로 인해 고국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평생을 외국을 전전하다 죽었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한다면, 셀 수 없는 눈물이 강을 이룰 것이다"라고 니콜라이 2세에게 경고한 적이 있다. 단순히 우연일 가능성도 높지만, 여러 모로 신비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여러모로 비범하다 이것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다만 이 편지가 진짜가 아니라는 말도 있다.


이것이 예언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분석에 가깝다. 애초에 교묘한 언행으로 황제와 황후를 구워 삶고, 온갖 모략에 도가 튼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자기 세력을 키웠던 인물이니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을 테고, 당시 러시아 민중의 비참한 삶을 보았을 때 정치감각이 있는 인물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내용이다. 무능과 탐욕이 눈을 가려서 그렇지. 


당시 러시아는 무리한 공업화, 군사육성정책으로 인한 빈민화, 무리한 식량 수출로 인한 만성적 식량 부족, 그리고 그 이전에는 사회 하층 대다수가 자기 땅 하나 없이 봉건제적 농노 상태였다. 사실 계기가 없고 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사달이 나지 않았을 뿐, 내부적으로는 계속해서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율 90%로 대변되는 라스푸틴과 로마노프 왕조의 전횡은 곪은 상처에 썩은 물을 붓듯이 상태를 더욱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그는 키가 크고 성기가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 병원에서 열린 "에로틱 박람회"에서 전시된 라스푸틴의 성기. 무려 23cm에 달하는 길이라고 한다. 참고로 해당 표본은 당연히 발기가 풀린 상태니, 발기가 된다면 그야말로 장어만 한 수준일 거다. 어쩌면 라스푸틴은 진짜로 오동나무 바퀴 돌리기가 가능했을지도? 


그의 추종자 중에는 이런 대물에 반한 여성들도 꽤 있었다. 모녀가 역으로 달려들었다는 자료도 있고…


라스푸틴그리고리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Распу́тин Grigori Yefimovich Rasputin


라스푸틴을 암살하고 나서 시신을 처리하던 이가, 라스푸틴의 크고 아름다운 성기를 보고서 요물이라며 칼로 잘라갔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살아있을 때 잘랐다고도 하… 지만, 부검 담당자 인터뷰에 의하면 살아있을 때 성기는 붙어있었다고. 어쨌든 그 뒤에 표본통에 담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보존된 라스푸틴의 성기는 최소 3개라고 한다. 케르베로스 그중 하나는 해삼으로 판명되었으나, 나머지 둘은 모두 실제 성기라고 하는 러시아 내의 풍문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복음경증(diphallia)일 수도 있으나 러시아 내의 풍문이라 검증할 길은 없다. 해삼의 경우처럼 다른 사람의 성기로 사기를 쳤다고 보는 게 옳다.


라스푸틴의 딸 마리아는 아버지의 신체 일부인 음경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녀는 1977년 사망할 때까지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라스푸틴 성기그리고리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Распу́тин Grigori Yefimovich Rasputin


하지만 위에 나온 러시아 박물관에 있는 음경 2개도 사람의 것이 아니라 대형 동물의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성기를 절단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A%B7%B8%EB%A6%AC%EA%B3%A0%EB%A6%AC%20%EB%9D%BC%EC%8A%A4%ED%91%B8%ED%8B%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