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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산 민주항쟁

[부마민주항쟁(2)] 계엄령의 의미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 이전글 [부마민주항쟁(1)]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계엄군의 진압 당시 부산, 마산에는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의 제7연대와 2연대의 일부 병력이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실제 사례들이다. 해병대원 이○○(당시 이등병)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하길, "해병대는 돌 던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하였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당시에 계엄군으로 출동한 해병대 동기들로부터 들었다. 당시 보호 .. 더보기
[부마민주항쟁(1)]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지금의 창원시 서부)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박정희 정권의 한계197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 인권 탄압 논란이 불거졌고, 당시 미국은 독재자 킬러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라 독재정권의 인권 문제를 압박해왔기 때문에 한미관계도 역대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또한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행해오던 개발 정책 또한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증세와 물가 폭등, 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