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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 정치 사건

[부마민주항쟁(2)] 계엄령의 의미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

  • 계엄군의 진압 

당시 부산, 마산에는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의 제7연대와 2연대의 일부 병력이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실제 사례들이다.


해병대원 이○○(당시 이등병)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하길, "해병대는 돌 던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하였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당시에 계엄군으로 출동한 해병대 동기들로부터 들었다. 


당시 보호 장구라고는 철모밖에 없었던 해병대원들도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계엄군


가내수공업자 김○○(당시 24세)은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고, 그 대가로 계엄군에게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 세 차례 폭행당한 뒤 군화발로 복부를 두 세 차례 걷어차였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당해 충격으로 실신까지 하였다. 깨어나고 나서도 다른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그러다가 낙하산 마크를 단 군인 선임자의 명령으로 광복동 파출소로 인계되었고, 파출소에서 집으로 귀가했다가 급성 복막염으로 실신하여 가족들의 의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당시 김○○을 수술한 부산 복음병원 외과 과장 장○○는 몸 내부적인 원인이 아닌 외상으로 인한 복막염, 그것도 군인에 의해 맞아 발생한 복막염 환자라는 점 때문에 충격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며, 수술 전날에도 군인들이 부녀자를 총 개머리판으로 치는 등 폭행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고 증언했다. 김○○ 이외에 군인에게 폭행당한 다른 환자들이 한두 명 입원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계엄령


금은방 직원 전○○(당시 29세)은 시위에 참여하던 도중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하자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으며, 그 때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하여 실신하였다. 그 뒤 두개골 함몰분쇄골절로 인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한○○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어 대수술을 받았다. 골절된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지 한달 뒤에도 인공뼈를 심는 두개골 성형술 역시 시행하였다.


박정희 박근혜 계엄령


부산 소재 동광섬유 직원 신○○(당시 37세)도 1979. 10. 18. 부산시 남포동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시청 부근에서 진압군에게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 등을 구타당하여 뇌 손상, 뇌경막 손상의 상해를 입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KBS영상실록" 2005. 9. 25. 방송분에는 “베레모를 쓰고 집총을 한 군인이 군용차량으로 이동하는 영상, 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적색 상의를 입은 청년을 구타하고 옆에 있던 군인들도 함께 발로 차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고 이는 외신기자가 기록한 18일 부산의 모습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산경찰서 전투경찰(일경) 서○○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 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여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고 진술하였다.


국제신문 취재기자 조갑제의 취재내용에 따르면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은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고 한다. 또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거나 젊어보이는 남자들 중에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부마항쟁


  • 이런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사망자까지 나왔다. 

사망자 신원은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무자 유치준(당시 51세)씨로 그는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한 10월 18일에 노무 일을 나갔다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10월 19일에 작성된 마산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에서는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에서 50여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 적혀져 있었다. 그의 신원은 소지품으로 들고 온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확인되었는데, 경찰은 그의 신원을 확인했음에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검과 가매장을 실시했다. 가족들은 그를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던 차에 보름이 지난 11월 초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박정희의 학살 계획?

박정희 계엄령\

신문에서는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 뿐입니다.

위의 발언을 들은 후, 신민당 황낙주 총무를 만나 김재규가 전달한 말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차지철 자신이 죽는 게 훨씬 더 빠른 해결책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인물과사상사, 강준만, p259


이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박정희는 4.19 혁명과 곽영주를 운운하며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사태가 심각해지면 자신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고,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 캄보디아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망언까지 했는데, 이에 김재규는 '이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이시기 부마항쟁과 맞물려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서울에도 계엄령과 함께 군투입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계엄령 시위


  • 항쟁 그 후, 천만 다행이었던 10.26 사건

나흘간의 시위 결과로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군 부대의 주둔으로 인해 시위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조갑제는 시위가 꺾였다고 평가했지만 시위가 언제든 다시 불을 뿜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팽팽한 긴장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 위수령 발동 후 6일 뒤에 일어난 10.26 사건이다.


기소된 사람들은 10.26 이후 석방되거나 재판을 거쳐 1982년 전두환 집권 후 사면을 통해 풀려났다.


항쟁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갑제는 시위가 다시 불을 뿜을 가능성을 낮게 보았지만 시위가 다시 불을 뿜었다면 위에도 나오지만 박정희는 곽영주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허가했고 차지철은 한술더떠 캄보디아를 언급하며 학살을 예고했다. 


그리고 실제로 만일 시위가 다시 불을 뿜었다면 무력을 통한 유혈 진압이 일어났을 것이며 부마항쟁의 계기가 된 김영삼의 체포도 임박한 상태였다(김영삼의 체포는 10월 30일에 실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구상했던 무력 진압은 결국 7개월 뒤 광주광역시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김영상 제명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광주에서 김대중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으로 그대로 재현된다(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중).


  • 부마 항쟁의 재조명과 재정립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내내 묻혀 있던 부마항쟁은 민주화 정부가 수립된 후 비로소 부마항쟁 관련자를 대상으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가 이루어졌고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 받았다. 또한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부마항쟁 기념식에 대통령의 축사 가 전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2005년에 통과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였으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11월에 부마항쟁진실규명신청을 접수했다. 그 뒤 2009년 12월에 진상조사가 시작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부마항쟁에 대한 간략한 조사 결과 가 2010년 7월 발표되었다.


그러나 99년에 이루어진 입법청원 추진과, 2010년에 추진된 대규모 진상조사와 피해보상에 필요한 특별법이 모두 통과되지 않아 부마항쟁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 유예되었다. 결국 2013년이 되어서야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 보상법 이 국회 통과되어 부마항쟁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길이 드디어 열리게 되었다.



  • 10월 유신 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자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

10월 유신 체제의 정당성의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사건으로 부마항쟁은 서슬퍼런 긴급조치 시대의 숨막히는 억압 구조를 뚫고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던 사건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 게다가 단순한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정권 내부의 갈등을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끝내 10.26 사건을 불러와 박정희 유신 정권이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반독재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아니 킬링필드의 참극이 부산·마산에서 벌어질 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벌어졌을때, 박정희는 4.19 혁명 때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허가헸고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망언을 했다.


박정희 군대


  • 부마항쟁 이후, 10.26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 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김재규가 10.26 재판에서 증언한 것처럼 그는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해 이 사건이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닌 민중봉기이며, 더이상 유신체제 존속이 어렵다는 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못느끼는 차지철과 대립, 결국 박정희 살해로 이어졌다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이 있었다. 


이 외에도 김재규는 당시 부마를 둘러싸던 군 사령부에 방문해 '절대로 발포하지 말라'고 단단히 단속을 했었다고 한다.


마민주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