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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건, 사고

[미제 사건] 박근혜 5촌 살인사건 (1)

대한민국 최고의 미스테리 사건이자, 언론사에게 있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최악의 영역


2011년 9월 6일(화), 육영재단 강탈 사태 핵심 관련자이면서, 대략 1년 6개월 후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당시 유력대선주자 박근혜 의원의 5촌 조카이자, 서로 사촌이었던 박용철과 박용수가 같은 날 북한산에서 사망한 사건.


박용철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 되었고, 그 범인으로 지목된 박용수는 박용철 사망 몇 시간 후 북한산에서 목을 매고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그런데 당시 매체들은 대선에 영향이 갈까봐 이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은 석연찮은 의혹을 뒤로 한 채, 사건을 둘 사이의 원한에 의한 살인과 자살로 종결시킨다.


그런데 이후 이 사건에 의문을 갖고 파헤치려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탄압을 받고, 관련된 주변 인물들은 행방불명이 되거나 사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체로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나가고 인터뷰를 따올 사람들도 다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취재도 쉽지 않았을 터. 사건 5년 후 그것이 알고싶다 팀이 공중파 최초로 다루었을 정도로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고의 불가침영역이었다.


육영재단 관련 문제는 한반도에서 김씨왕조를 제외하면 최고의 성역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 사건이야말로 더욱 성역을 굳건히 지켜왔던 것이며 이것을 깨려고 수많은 기자들(대표적으로 주진우, 김어준)이 뛰었으나 쉽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누군가가 갑자기 픽픽 쓰러져 죽거나, 아니면 기자 자신이 협박받거나 해서 도망다니느라 취재가 어려운 것. 


사실 이 사건은 정확하게 해결됐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2011년 9월 6일(화), 육영재단 강탈 사태 핵심 관련자이면서, 대략 1년 6개월 후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당시 유력대선주자 박근혜 의원의 5촌 조카이자, 서로 사촌이었던 박용철과 박용수가 같은 날 북한산에서 사망한 사건.


1990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남매는 육영재단 소유권 때문에 크게 싸운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1990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남매는 육영재단 소유권 때문에 크게 싸운다.


이때 육영재단은 이사장 박근혜를 등에 업은 최태민 일가가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박지만, 박근령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언니랑 최태민 좀 떼어내 달라"고 탄원서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하여튼 이 문제 때문에 다투다가 결국 박근령은 친언니인 박근혜를 밀어내고 차기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육영재단은 부동산만 4조원 가치(2016년 시가 기준)를 지니고 있는 대형 재단으로, 임대 수익사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으나, 재단 운영이 폐쇄적이라 온갖 비리 의혹으로 점철되었던 탓에 수익금에 대한 루머가 무성했다. 한데 이런 현상은 박근혜가 물러나고 박근령이 취임한 후에도 딱히 해소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와중 2007년부터 그동안 힘을 합쳐왔던 박근령과 박지만의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박근령의 남편인 신동욱 때문이었는데, 신동욱은 2007년 2월에 14살 연상의 박근령과 약혼하고 1년 8개월 후인 2008년 10월에는 결혼한다. 그런데 약혼한 이때쯤부터 박지만은 매형 신동욱이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독점할 것을 두려워했는지 박근령-신동욱 커플과 갈등을 빚게 된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매형 신동욱이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독점할 것을 두려워했는지 박근령-신동욱 커플과 갈등을 빚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갈등이 깊어지자 박근령과 박지만 양측에선 조직폭력배와 불법 용역회사 등을 동원한 폭력행사까지 서슴치 않게 되는데, 급기야 2007년 11월 28일에는 불량배 200여명이 동원된 대규모 폭력 사태까지 터진다. 그리고 이때 한센병자를 동원한 박지만 측은 기어코 육영재단을 장악하게 되고, 당시 이사장이던 작은누나 박근령과 그녀의 측근들은 육영재단에서 모조리 쫓겨나게 된다. 


박용철은 육영재단 폭력사건 당시 박지만의 최측근으로서 폭력 사태를 주도한 바 있는 인물이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박용철은 육영재단 폭력사건 당시 박지만의 최측근


박용철은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손자이자 국제전기기업 대표인 박재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삼남매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결혼 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기 때문에 사망 당시 국적은 캐나다였다. 박용철은 2007년에 귀국하여 당시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박근혜의 경호원 노릇을 하였는데, 이 때 박지만과도 손을 잡고 육영재단 문제에도 관여하였다.


2007년 7월 박용철은 박근혜캠프에서 중국 재경부 장관을 만난다는 이유로 당시 박근령의 약혼남이자 백석문화대학교 겸임교수였던 신동욱과 중국 칭다오에 함께 갔다. 그런데 칭다오에서의 첫날 밤에 신동욱이 자기 신변이 위험하다면서 건물에서 뛰어내려 골절상을 입고 중국 공안에게 신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육영재단 폭력사건에 개입하여 박근령 이사장을 쫓아내는 데는 것을 주도했다. 


당시 중국에서 구사일생으로 귀국한 신동욱은 2년 반 뒤인 2010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홈페이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박지만이 박용철을 시켜 나를 살해하려 했다. 육영재단 강탈 사건에서 박지만은 허수아비였고 배후는 박근혜의 주변 사람들이다.”라는 주장을 사진과 함께 올렸다. 이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문제가 되자 홈페이지 주인이던 박근혜는 하나뿐인 제부를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한다.


(2016년 12월 16일자 노컷뉴스 기사에서 육영재단의 폭력사건에 관여했던 관계자의 증언을 다루었는데, 이 관계자에 의하면 당시 신동욱이 표를 깎아 먹는다'고 판단한 박지만 EG회장과 참모 진영에서 '신동욱을 없애는 게 낫다'고 판단했고 이에 신동욱을 미얀마에서 총기로 살해할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재판 과정에서 신동욱이 주장한 청부 살인 시도 건은 인정되지만 박지만과의 연관성은 부정되었다. 이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용철은 박지만이 이 사건과 무관하고, 박지만의 측근인 정 씨가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0년 9월 1일, 재판 과정에서 박용철이 자신이 한 증언을 번복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증인으로 나온 육영재단 전 법무실 부장 이 모씨가 “박지만이 박용철에게 신동욱을 제거하라고 지시한 육성 녹음이 있고 통장으로 돈을 부쳐 준 증빙이 있다.”라는 얘기를 박용철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박용철도 이를 긍정하면서 “EG그룹 회장 박지만의 비서인 실장 정용희가 내게 회장 박지만의 뜻이라고 말한 육성을 휴대전화 단말기에 녹음해 놨다.”라고 증언하였다.




박용철의 증언 이후 2011년 8월 신동욱은 처남이 자신의 살해기도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여 법정 구속되었는데, 이에 신동욱 측 변호인은 2011년 9월 27일로 예정된 변론에 박용철을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박용철이 9월 27일에 증언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변론을 20여일 앞둔 2011년 9월 6일, 중요한 증언을 하기로 했던 박용철이 북한산 국립공원 사무소 수유분소 앞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동욱은 결국 이 소송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박용철이 이처럼 진술을 번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본인이 자세한 내막을 밝히기 전에 숨졌으므로 자세한 부분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박용철은 자신의 주도로 육영재단에서 박근령 세력을 축출한 후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에 잠시 임명되었으나 이내 교체되었고, 이후 박지만 세력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당시 박용철의 지인들과 범죄 전문가들은 박지만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은 박용철이 박지만을 압박하려고 진술을 번복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출처 : https://namu.wiki/w/%EB%B0%95%EA%B7%BC%ED%98%9C%205%EC%B4%8C%20%EC%82%B4%EC%9D%B8%EC%82%AC%EA%B1%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