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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건, 사고

[온보현] 너무나 소심한 택시 연쇄살인마

"내 나이만큼 사람들을 죽이겠다."- 대한민국의 강력범죄자, 택시 연쇄살인마.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 봉성 온씨 집성촌 마을에서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국민학교를 완전히 졸업하지 못한채, 아버지를 따라 당시 빈민가였던 서울의 수유리로 올라왔다고 한다. 어릴때 온순하고 착했던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예쁨을 많이 받았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을 하다 택시 회사에 들어갔다. 퇴직을 한 그는 채소 사업을 하였는데, 사업이 잘 되지 않아 결국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평소에도 그는 가족, 친구, 친척들과 연락을 끊은 채 고립된 삶을 살았기에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항상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목격한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란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품은채 자랐다. 


온보현 사형


그의 분노는 1981년 그가 24살이 되던 해 더욱 비대해 졌는데,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원인이었다.


1994년 8월 13일, 그는 약 20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그의 숙부 집에서 4일 동안 얹혀 살며, 이웃으로부터 삽과 낫을 빌려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구덩이를 팠다. 그의 고향이 곧 그의 본관이어서 조상들의 묘소가 뒷산에 있었는데, 숙부는 그가 벌초를 한다고 생각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1994년 8월 5일 ~ 15일, 그는 곧 구체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살인 수첩까지 장만하였다. 구체적인 살인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중, 그는 그가 전에 했던 택시기사 일을 연상하고는, 차고에 세워져 있던 강북수유리의 국제운수 소속의 서울 1 바 1287 스텔라 차량을 절도하였고, 곧이어 미사리 쪽에서 대진운수 경기 1 바 1237로 번호판을 위조하였다.


온보현 살인 수첩


1994년 8월 28일, 그는 강동구 암사동 사거리에서 한명의 여성을 태웠다. 그는 흉기로 여성을 겁박해서 학생증을 뺏은 후, 그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차문을 여는 순간 피해자는 살려달라고 크게 외치며 영동고속도로 이천 부근에서 도망쳤다. 그는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를 뒤쫒지 않은채 그대로 도주하였다.


1994년 9월 1일 이후, 그는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곤지암 주차장에서 에스페로 택시와 택시회사와 번호판을 바꾸고 다음날 새벽에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다음날 새벽 1시~3시경 그는 43세 권모 씨를 차에 태워 구리-안산고속도로 입구에서 성폭행을 한 차례 한 후, 그의 고향 쪽인 김제 영천마을 야산으로 피해자를 끌고 가서 앞서 파놓았던 구덩이 옆에서 한 차례 더 성폭행을 하였다. 




그 후 그는 피해자의 입과 팔 그리고 다리를 포박한 뒤 구덩이 안으로 밀어넣었다. 피해자는 그가 숲 근처에서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 도주하여 인근에 위치하였던 공사장의 인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한편 잠에서 깨고 난 뒤 피해자가 도주한 사실을 깨달은 온보현은 그날 아침까지 숨어있었는데, 경찰이 그가 운전하던 택시를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본 뒤, 그날로 대전으로 택시를 타고서 도주하였다. 


이후 경찰은 지난 오년간 수유리 근처에서 일했던 모든 택시기사들의 이력서들을 수집한 뒤, 피해자와 대조심문을 통하여 범인을 확정짓고 범인의 신상을 파악하였다.


1994년 9월 11일, 온보현은 저녁 8시 30분경에 서울 독산동 부근에서 21세 학생 엄모 씨를 태웠다. 그는 올림픽대로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한 야산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두 번에 걸쳐서 한 뒤, 피해자를 나무에 포박하였다. 그는 피해자를 죽이지 않은 채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뒤, 2차 범행을 하러 야산을 내려갔다. 이틈을 탄 피해자는 포박을 풀고 도주하였다.


1994년 9월 12일(1차 살인), 그는 저녁 8시 30분 경에 양재동 부근에서 26세 회사원 허모 씨 를 태웠다. 


그는 서초 톨게이트 부근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전날 피해자를 포박해 놓았던 강원도 횡성의 야산으로 끌고 갔으나, 포박당한 채 남겨졌던 피해자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되자 그는 분노에 가득차 피해자를 나무에 묶고 피해자의 얼굴, 무릎, 다리 등을 삽으로 가격하고는 도주하였다. 상처가 심했던 피해자 허 씨는 사망하였다. 한편 범행현장에서 벗어난 온씨는 신한은행 풍납동 지점에서 피해자 허씨의 외환은행 카드를 이용하여 61만원을 인출하여 사용하였다.

대한민국 연쇄살인


1994년 9월 13일, 그 후 그는 강동구 천호동 사거리 부근에서 19세 회사원 노모 씨를 태웠다. (살인미수)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그는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김천에 위치한 여관으로 끌고가 강제로 범하였다. 피해자는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차분했기에 그는 피해자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온씨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홀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피해자의 말에 묘한 감정을 느껴 14일 새벽에 피해자를 고덕동에 위치한 피해자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1994년 9월 14일(2차 살인), 온씨는 가락동에서 24세의 경기도의 모 특수학교 교사 박모 씨를 태운 뒤,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앞 사거리 부근에서 칼로 피해자를 위협했으나, 피해자가 심하게 반항한 나머지 흉기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이에 극도로 흥분한 온씨는 피해자의 허벅지와 배 등을 수차례 찔러 살해한 뒤, 경북 금능군(현 김천시 외곽)에 위치한 도로변에 시신을 유기하였다. 이후 상처를 치료하고 은신하기 위해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모 여관 3층의 구석진 방에서 13일 동안 은신하였다. 


손을 베인 온씨는 범행을 중단하였는데, 부상과 더불어 이전까지 겪을 수 없었던 피해자의 심한 반항으로 인하여 본디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온보현은 범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의욕을 잃었다. 그리고 경찰은 여전히 온씨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한채 였다.


1994년 9월 20일 지존파가 검거되면서, 함께 온보현과 관련된 강력범죄 사건 공개수사가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공개수배와 더불어 그가 택시 기사이자 범행에 택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어 불심 검문 탐문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1994년 9월 27일, 그는 당시 지존파를 검거하여 유명해졌던 서울 서초경찰서 입구에서 의경에게 "자수하러 왔다" 고 말하며 자수하였다. 


한국 연쇄살인마 온보현



그는 경찰 조사에서 밝히기를, "지존파와 나를 비교해보고 싶다. 지존파와 같은 감방에 넣어달라" 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자수를 했으니 선처가 될 리 없었다. 그가 바랐던 것과 같이 온보현은 지존파 못지않게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던 것은 물론 다음해 11월에 신속하게 집행된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건 당시에나 지금이나 경찰이 많이 무능해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물론 사건이 일어난 94년에는 지금같은 정보화 수사 시스템이 없었을 뿐더러, CCTV나 도로교통정보 수집 장치도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목격자나 증언이 접수되지 않는 이상 잠적해버린 범인의 동선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아무리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경찰이라도 직접적인 물증이 없으면 범죄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팟캐스트 배상훈의 크라임에서는 전국 경찰서가 공조수사만 했어도 사건이 이렇게 길어지지 않았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특히 세번째 피해자인 엄 양이 횡성 야산에서 도망쳤을때 경찰은 수사의 기본인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를 간과한데다가 특히나 온보현은 엄양에게 친구를 데리고 돌아온다는 말까지 했었는데 그 장소에서의 잠복수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또 당시 실종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던 경찰 태도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피해자 박 양의 부모에 따르면 실종된 다음날 바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으나, 단순 치정 문제로 인한 가출로 여기며 무시했다고 한다.